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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바람 말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이 어디 없을까.
한여름속 겨울, 이한치열(以寒治熱)로 제격인 곳이 있다. 경북 의성 빙계계곡, 경남 밀양 얼음골, 충북 제천 금수산 능가계곡, 전북 진안 풍혈냉천 등이 바로 그곳.
찬 공기로 인해 온몸이 금세 얼어붙는 곳, 발 담그기 무섭게 한기가 온몸에 퍼지는 차가운 계곡수. 여름 휴가지로 이만한 데가 또 있을까. '여름과 겨울이 뒤바뀐 세상'에서 더위를 식혀보자.
#경북8승 중 하나-의성 빙계계곡
의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석탑 박물관'. 지명중 탑리가 있을 정도로 수려한 풍광 속에 우뚝 선 탑이 많은 곳이다. 하지만 무더위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각광받는 곳이 있다. 이름에서부터 시원함이 느껴지는 빙계계곡이다.
예부터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 하여 붙여진 빙계계곡에는 유난히 얼음 빙(氷)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많다. 빙계계곡을 둘러싼 산이 빙산, 계곡이 있는 마을이 빙계리, 계곡 내 절터는 빙산사터.
의성문화원 이종우 원장은 "이곳 빙계리가 속한 의성군 춘산면도 과거에는 빙산면이었는데 조선 철종때 마을에 '빙'자가 너무 많으면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 해 봄춘(春)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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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계계곡은 여느 바위에서도 냉기가 나온다. | |
군립공원인 빙계계곡은 빙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기암절벽을 돌아 굽이쳐 한폭의 동양화처럼 멋스런 풍광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경북8승 중 하나로 손꼽힌다.
계곡 입구는 현재 빙계서원 중창 공사중. 도산서원보다 17년 앞선 이 서원은 올해말 완공될 예정이다. 이곳에는 이언적 유성룡 김안국 등 5현이 모셔진다.
서원을 지나 다리 건너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엔 시원한 계류와 함께 거무죽죽한 운치있는 바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굽이치는 개울물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떨어질 듯 매달린 바위 틈에 꽃이 피어 드리워졌구나"며 이 곳을 노래했다.
길 왼쪽의 바위 틈에서는 소문대로 찬 기운이 느껴지고 관광객들은 신기한 듯 다가가 바위 주변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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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 빙계계곡의 풍혈. | |
빙계계곡의 하이라이트인 빙혈(氷穴)과 풍혈(風穴)로 가는 입구, 빙계상회 안주인 김향숙씨는 "초복때쯤부터는 하루종일 찬 기운이 바위틈새로 뿜어져나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고 설명했다.
빙혈과 풍혈까지는 3분도 채 안되는 거리. 아름다운 숲과 조화를 이루는 빙산사지 오층석탑을 지나면 갑자기 냉기와 함께 뿌연 김이 앞을 가린다. 이구동성으로 '와~아'.
원래 빙혈은 빙산 기슭 바위에 뚫린 굴이지만 입구를 작은 건물로 단장해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도록 설계돼 있다. 들어가면 벽돌과 유리문으로 막아 놓은 곳에서 서늘한 기운이 나와 온몸에 오싹 한기가 돋는다. 입에서 하얀 입김도 나온다. 빙혈에서 나와 계단을 오르면 풍혈이 있다. 바위와 바위 사이의 작은 굴이다. 어른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공간이다. 빙혈에 비하면 좀 떨어지지만 차고 뿌연 냉기를 발산한다.
빙계계곡 입구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더운 물이 나오는 빙계온천이 있다. 찬바람이 불고 얼음이 어는 계곡 근처에 온천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흥밋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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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 빙계계곡의 빙혈. | |
#원조 얼음골-밀양 얼음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재약산 기슭 해발 600~750m에 위치한 9000여평의 골짜기. 정식 이름은 시례빙곡(詩禮氷谷)으로 천연기념물 제224호.
삼복더위에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더운 김이 올라와 오래전부터 부산 경남지역에서 피서 명소로 자리매김해왔다.
접근성이 뛰어난 의성 빙계계곡에 비해 밀양 얼음골은 주차장에서 넉넉잡아 25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 경사가 다소 급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 동네 약수터 가는 수준이니 걱정을 안해도 된다.
"너무 오랫동안 많은 인파가 다녀갔고, 그에 따른 개발이 진행돼 최근에는 얼음을 보기가 힘들어졌지만 바위틈 사이로 불어 나오는 시원한 냉기와 차가운 계곡물은 예전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얼음골 관리인 김영근씨는 "얼음골은 올 여름 피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장담했다. 김씨는 "현재 결빙이 외관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바위 밑은 얼어 있다"며 "평균 온도는 0~1도를 오르내린다"고 덧붙였다.
얼음골에서 왼쪽으로 200m 정도 산길을 따라 꺾어지면 수십m 높이의 폭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마불폭포다. 바위와 바위가 맞붙어 있고 그 틈새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비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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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얼음골에서 더위를 식히는 피서객들. | |
#진안 풍혈냉천과 제천 금수산 능가계곡
마이산으로 유명한 전북 진안에는 풍혈냉천이 있다. 찬바람과 함께 얼음처럼 찬 샘물도 함께 솟는 얼음골은 국내서 유일하다. 조선조의 명의 허준이 이곳 냉천의 물로 약재를 달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항상 영상 4도를 유지하는 냉천의 물은 맛도 일품일 뿐더러 이 물에 목욕을 하면 피부병과 무좀이 치료되고 장복할 경우에는 위장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충주호와 마주보고 있는 제천 금수산 자락의 능가계곡도 삼복염천에 얼음이 난다는 얼음골로 유명하다. 예부터 이곳 얼음골 고드름을 먹으면 기침이 멎는다고 해서 멀리서 일부러 찾는 사람이 많다.
#겹겹이 쌓인 돌들로 장기간 보냉-왜 한여름에도 얼음어나?
여름에 얼음이 얼고 겨울에 온기가 발하는 얼음골은 대자연의 우연한 산물일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 그 속에는 바로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지형적 지질학적 요건이 우선 필요조건이다.
밀양 얼음골이나 의성 빙계계곡 등지의 유명 얼음골은 예외없이 근처 산에서 무너져 내린 수십㎝에서 수m 크기의 돌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너덜(테일러스)이며, 암석은 대부분 화산폭발로 한번 불에 구워져 단열효과가 높은 화산암 계열이다. 바로 이런 구조가 한여름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의 신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본적 원리는 간단하다. 겨우내 찬바람이 돌틈으로 들어가 돌들을 차갑게 식혀 놓는다. 봄이 되면 얼음골에는 온기가 들어가면서 돌틈에 있던 무거운 찬공기를 아래쪽으로 내몬다. 차가워진 바위는 쉽사리 데워지지 않고 여름에도 영하의 온도를 유지한다. 이 때문에 골짜기의 제일 아래쪽 얼음골에서는 영하의 찬바람이 불어나와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것이다.
최근 얼음골 신비가 한꺼풀씩 벗져지고 있다.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변희룡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부터 거의 매주 밀양 얼음골을 찾아 얼음골의 비밀을 찾는 연구를 한 결과, 최근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한 구멍에서 계절을 달리해 냉혈과 온혈이 나온다고 믿었는데 연구결과 지금의 냉혈보다 약 400m 위인 해발 800m 지점에서 온혈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변 교수팀이 밝힌 밀양 얼음골의 비밀은 지하에 유입된 찬 공기와 지하수 때문. 돌 틈새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는 지하수를 얼리고 이때 열은 방출된다. 이 열이 공기를 데워 위로 올라가게 해 습도가 높은 따뜻한 공기를 온혈로 뿜어져 나오게 한다.
이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열과 수증기는 고지대로, 물과 냉기는 저지대로 이동한다. 따라서 냉혈은 저지대에, 온혈은 고지대에 위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