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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울산의 오지마을. 두서 백운산 사방팔방.

풀과나무산 2011. 6. 3. 08:04

[울산의 오지마을]백운산 줄기 따라 박혀 있는 숨은 보석
(5)두서 백운산 갈밭메기, 안수중내
갈대 많고 가파른 갈밭메기
버려진 생수공장에 ‘눈살’
아미산 물탈골 위 안수중내
빨치산의 뼈아픈 상처 간직
2010년 12월 22일 (수) 20:54:36 홍영진 기자 thinpizza@ksilbo.co.kr
   
 
  ▲ 화전민이 살던 안수중내의 외딴집.  
 

◇산에 갇힌 섬

영남알프스 벨트를 따라 동북으로 뻗은 울주군 두서 중심에 백운산(907m)이 있다. 두서의 두(斗)는 북두칠성을 뜻하고, 두서면 상징마크인 삼봉은 백운산 감태봉을 가리킨다. 그만큼 두서는 산이 높아 별이 가깝고, 골이 깊어 산에 갇힌 섬이다.

필자는 두서의 오지마을을 찾아서 백운산 사방팔방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차를 타면 한 나절에 돌아 볼 길을 여남은 번을 드나들며 재를 넘고 또 넘었다. 산내 등만디에서 백운산 뒷마을인 소호리를 지나, 그 옛날 소금 장수가 다니던 고헌재를 넘어 선필과 탑골, 내와, 인보로 흘러갔다. 구절양장 돌고 도는 고갯길로 끝이 없는 첩첩산중인 백운산 기슭은 유난히 꿩과 새가 많아 팔랑개비처럼 싸돌아다녀도 지칠 줄을 모른다. 물어물어 찾아간 오지마을도 막상 가보면 오지다운 오지는 대게 열에 한두 군데에 불과하지만, 백운산 기슭에 숨어있는 마을들은 열에 반이 오지에 가깝다.



◇사라질수록 그리움은 큰 것

오지 여행은 시간여행이다. 애
   
▲ 상선필 마을. 뒤쪽으로 멀리보이는 산이 백운산.
타게 찾던 오지마을을 찾았을 때 그 시간 여행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갈밭메기를 찾아갔을 때처럼 가끔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다. 갈대가 많고 가파른 갈밭메기에 들어선 생수공장은 오지의 속살을 고스란히 도려낸 모습이었다. 오지마을을 깡그리 뭉개고 대신 그곳에 들어선 생수공장을 바라 바라보는 심정은 낯선 세계에 서 있는 것처럼 먹먹했다. 더구나 무슨 영문인지 생수공장은 문을 닫아 놓고 있어 그 허망함은 더했다. 과거 이곳에는 3·1독립운동을 했던 김의원이 살았었고, 참숯을 굽던 화전민들의 애환이 배어 있던 곳이었다. 아, 애타게 찾던 갈밭메기! 사라질수록 그리움은 큰 것. 제발 오지를 얕보지 마시라. 정서의 깊이에 기여하는 오지마을을 도려내면 가뜩이나 각박한 현실에 쉽게 절망하고 만다.

◇신이 그린 빛바랜 풍경화
   
▲ 나락을 부대에 담는 내와의 어느 농부의 아내.


KTX 울산역에서 경주 방향으로 약 15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두광중학교가 나온다. 학생 수가 줄어 폐교 위기에 처한 이 학교는 고육지책으로 인근 두서초등학교와 합쳐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케 되었다고 한다. 백운산 기슭이 얼마나 산간벽지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바다. 두광중학교에서 북쪽 계곡을 따라 4km 정도 올라가면 수중내 마을이 나온다. 양지바른 마을회관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은 어머니 품속 같이 따스하다. 정성을 드리지 않고 약수를 마셨다가는 독사가 물을 마시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는 아미산 물탕골을 거슬러 올라가면 공동묘지 아래 안수중내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화전민이 살던 외딴 집이 한 채 숨어 있다. 대나무에 가려진 외딴집 풍경은 신이 그린 빛바랜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마른 시래기 같은 헛간이며, 닳아 반질반질해진 툇마루며, 갸우뚱 기운 오두막의 때깔은 흑백시대 그대로이다. 마을 뒷산 아미산과 공동묘지는 1953년 한국전쟁 당시 신불산에서 쫓긴 빨치산 잔당과 그 추종자 200명의 뼈아픈 상처가 서린 곳이다. 당시 잔당 지휘자는 이 일대를 소상하게 알던 사내로 알려졌는데, 그는 세상이 바뀐 듯 일대를 주름잡았다고 한다. 다람쥐처럼 돌아다니는 잔당을 토벌하던 빗발치던 총성과 섬광 같은 야광탄을 이 일대 사람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사살된 잔당들을 두서지서 움막에 전시했다. 남편의 시신을 찾아 시신 구덩이를 휘젓고 다니던 어느 아낙이 그 지휘자의 시신을 발견하곤 짚신으로 얼굴을 두들겨 패며 분노하던 장면을 목격했다고 전한다.



◇착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땅

풍수지리로 명당이라는 인보 두서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해발 400m의 막다른 오지마을인 선필을 만난다. 협곡 고지대에 올망졸망 형성된 선필은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아 누가 봐도 오지의 면모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여름이면 추워서 못 살고, 겨울에는 멀어서 못 나간다는 산골이다. 상선필은 길이 멀고 비탈져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이곳이 안태고향인 성삼복(77세)씨를 찾아 간 무렵은
   
▲ 배성동 시인
시월상달. 집집마다 김장이 한창이었다. 이웃 아낙들이 모여 소금물에 배추를 절이는가 하면, 양념을 버무리는 집도 있었다. 마침 성씨는 얼어터진 이웃집 수도를 고치는 중이었다. 착한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 간데서 생긴 선필. 마을 이름값을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살가움이 묻어났다.

이 집 저 집 담 너머로 들깨 바람이 불어왔다. 고구마 줄기를 다듬으며 들깨를 선풍기로 챙이질 하는 노부부는 “서리가 내리면 아무 짝도 못써” 하며 들깨 터는 일에 골몰했다. 내와의 우송죽(67세)씨 댁의 송아지는 감기가 걸려 4만 원짜리 감기주사를 맞았고, 방앗간 권 노인은 지난해 경운기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었으며, 비녀대신 볼펜을 쪽머리에 찌른 동네 할머니는 “이젠 소 키울 힘도 없다”며 마구간을 도장으로 아예 개조해 버렸다.



◇침묵으로 말하는 오지마을

백운산 기슭의 오지마을은 정겨움과 애환이 서린 곳이 많다. 거슬러 올라가면 대원군에서부터 박해받아 숨어 들어온 탑골, 선필 같은 은둔마을이 그러했고, 한국전쟁 후 잔당과의 격전지가 된 아미산 기슭의 마을들이 그랬다. 숨어야만 남을 수 있었던 오지마을은 침묵으로 말한다.

배성동 시인



갈밭메기 최후의 주민 최이부 前 두서면장

   


두서 최후의 오지였던 황새골에서 16년을 거주하다 독가촌 이주정책으로 신전에 집을 옮긴 최이부 전 두서면장. “고추를 뿌면 목이 따갑지만, 노인네뿐인 시골에 방앗간을 할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

운영하는 방앗간에서 고춧가루를 분쇄하는 기계음이 요란했다. 장정이 하루 종일 일을 해도 고작 쌀 한 되가 삯이었던 시절을 최씨는 갈밭메기 황새골에서 보냈다. 땔감이 귀하던 시절, 민둥산에 까만 염소를 낚아 채가는 독수리를 쫓아 아이들은 타잔처럼 뛰어 다녔다. 황새골 삼거리는 내와, 전읍, 인보와 맞물린 경계지점으로, 웅성거리며 장을 넘나들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던 길목이었다. 선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갈대지붕이 날아가곤 했다. 식민지 시절에는 소까지 기름과 머루나무 덤불을 공출하던 통로였고, 대원군 시절에는 천주교의 박해를 피하던 길이었다.

지금은 임도라도 생겼지만 당시에는 한 사람이 겨우 다닐만한 토끼 길을 따라 소금과 곡물, 비료부대를 등짐에 지고 줄잡아 두 시간을 걸어야 인보장에 갈 수 있었다.

출처 : 오지마을 여행
글쓴이 : 현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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