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자연농법 7
자연농법의 원리
자연은 하나(전체)이다. 자연농법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라는 결론에 도달할수 있었던 것은 자연은 완전하며 분별적이지 않은 지혜에 의해서 작물을 키울수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확인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사법은 연구실 학자들의 이론이나 논리의 가정을 위한 것이 아니며, 게으른 농부를 위한 편리를 위한 농법이 아니라, 신과 자연과 인간 참 얼의 실체를 직관하여 삶의 회의와 의문을 전 삶적 合一을 통해 이루려는 것에 근본 바탕을 둔 것이다.
인간은 산을 이해하려 할 때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이 한다. 과학자들은, 산에 올라 광물과 식물과 동물과 생물의 분포를 조사하고 생물학적,지질학적,기후학적 연구하여 이것을 종합하여 산이라 규정한다. 예술가들은, 산의 진정한 모습은 멀리서 조망함으로 알수있다는 전재하에 산의 원경을 그림과 사진과 영상에 담아내어 그것이 산의 참모습이라 정의 한다. 일반적인 합리주의 자들은 과학자들의 견해와 예술가들의 생각 모두를 수용함으로 산의 참모습을 볼수 있다고 확신한다.
전체가 없이는 부분이 없고 부분이 없이는 전체는 없다. 산을 분별하여 일부를 보고 산이라 단정 짓는한 그것이 어떠한 방법이든 산은 알수 없다. 산을 진정으로 알려면 먼저 산을 구별하기 이전에 진정한 참나 즉 진아(참얼)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일생동안 축적한 모든 지식과 관념들을 하나하나 내려 놓아 텅빔(空),완전한 無(무)에 도달 했을 때 일체의 分別智(분별지)는 사라지고 진정한 산을 直觀(직관)하는 開眼(개안)이 열릴 것이다.
자연농법은 신과 자연과 인간이 合一(합일:하나됨)하는 방편이며 방법이다. 자연과 작물과 인간이 하나 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한그루의 벼가 되어서 바로 보고 듣고 이해하여야 한다. 벼는 키우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것일 때, 벼의 자라남을 無心(무심)으로 바라볼수 있을 때 벼와의 合一(합일)은 이루어 지며 벼와 하나 될수 있다. 자기를 내려놓고 버리는 것만이 자연과 하나되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불완전함이란 없다. 땅에 떨어진 한알의 보리 씨알은 틀림없이 싹이트고 스스로 자라나며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다. 만약 도중에 보리가 병들고 시들어 죽어가는 부자연 스러운 현상이 일어 난다면 그 원인은 인간의 불완전한 지식과 행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각성하고 버려야 한다. 자연에는 善惡(선악)이란 없으며,본래는 해충도 없고 익충도 없다고 보는 것이 자연농법의 길이다. 해충이 발생하여 보리를 망쳤다면 그것은 인간이 무엇인가 물리적인 힘을 가한 것이다. 땅을 갈아 땅의 균형을 파괴 했던지. 풀들을 모두 뽑아 황폐화 하였거나, 보리를 지나치게 밀식 했다던지,보리에 붙어 살아가는 벌fp들을 해충이라 하여 전멸 시키는등 자연의 균형을 파괴 했을 때 발생한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곧게 자라나면서 제나름의 수형을 유지한다. 뿌리는 뿌리대로, 줄기는 줄기대로, 가지는 가지대로, 잎은 잎대로 서로 겹치거나 엉키지않고 균형을 이루어 자라므로 골고루 햇빛을 받으며 성장한다. 인간이 나무들을 옮겨 심고 가지를 전정하면서 나무의 고통은 시작된다. 수형은 꼬부라져 변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헛가지를 친다. 뿌리는 곧은 뿌리를 잘려버려 더 이상 깊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필요한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한다. 과일나무는 인간의 이기를 위하여 가위로 잘려지고 철사줄로 꼬부려져 강제로 열매를 맺는다. 인간이 물리적 힘을 가할 때 나무들은 본래의 모습이 파괴되고 부자연 스러운 모습이 된다. 본성을 잃어버린 나무는 약해지고 병들어 간다. 자연은 완전하며 불완전 함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아 무지한 행위들을 반성하고 자연 스스로의 힘에 맏기는 것이 자연농법의 길이다.
자연농법은 時空(시공)을 超越(초월)한다. 인간은 태어남이 시작이며 죽음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生老病死(생노병사)에 괴로워 하고 슬퍼한다. 대 자연의 순리를 시공을 초월해서 보면 모든 작물은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느 스스로 성장하고 가을이면 죽어간다. 그 죽음의 내면에는 씨알이라는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으며 그 씨알은 봄이 오면 또다시 싹이터서 보리의 삶은 영원히 이어나간다. 이러한 작물의 순리를 이해하고 그 순리에 의해서 작물이 스스로 자라고 결실을 맺어 순환 하도록 도우는 것이 자연농법임을 이해 하여야 한다.
인간은 곡식과 채소 과일만을 가치가 있는 작물로 생각한다. 자연에서는 작물이란 없다.작물이라는 이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기일 뿐이다. 자연농법은 分別智(분별지)와 相對界(상대계)적 관념을 버리고 시공을 초월한 絶對界(절대계)적 사고에서 이루어 져야한다. 시공의 초월이 자연농법의 시작이고 끝이며 바른 이해이다.] 작물을 벌레가 먹는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작물과 그 작물을 먹는 벌레로 따로 분별하여 보는 것이 分別智(분별지)이며, 작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며 벌레는 작물을 해치는 해충이라고 보는 것이 相對界(상대계)이다. 반면에 작물과 벌레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상생의 관계로서 자연의 순리와 운행의 이치로 보는 것이 時空(시공)을 초월한 相對界(상대계)적 사고이며 자연농법의 이해이다.
자연계에는 부분(땅,하늘,동식물,미생물)을 포함한 전체 즉 지구가 있고, 그 전체를 포함한 더 큰 전체 즉 태양계가 있으며, 더 큰 전체를 포함한 더더욱 큰 전체 즉 은하계가 존재하고, 더더욱 큰 전체를 포함한 무한한 전체 즉 우주가 있다. 동심원의 파장처럼 그 우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짐작조차 할수 없는 것이다. 이 우주는 한치의 불완전이나 착오도 없이 스스로 운행되고 있다. 이것이 대 자연계이다. 이러한 대자연계에서 인간이 사물을 분별한다는 것은 무지이며 무식의 극치일 뿐임을 아는 것이 자연농법 이해이다.
자연농법은 無慾(무욕)의 농법이다. 자연농법은 작물의 생산으로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거나 조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서는 안된다. 인간의 목숨을 건강하게 유지할 생명의 양식을 얻는 것이 사명이다. 만족할줄 알며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더많은 수확을 욕망하며, 맛있는 쌀, 부더러운 보리, 쓰지않고 깨끗한 채소, 크고 단 과일들을 요구 해 왔다. 그결과로 인간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과학자들은 무분별하게 품종을 개량하고 유전자를 조작해 왔다. 개량되고 조작되 대량생산되는 작물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그 끝은 어디일지 짐작조차 할수 없다. 아주 조그마한 맛의 욕망,작은 단맛을 키우기 위해서 품종 개량을 했을 때 조차도 자연은 아주 강하게 저항한다. 과일나무들은 인간이 다수확과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한번 가지치기를 하면 일생동안 가지치기를 하여 주어야 한다. 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조정하는 일을 멈추고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무는 혼란에 빠져 살아남기 위해서 수많은 헛가지를 만들고 인간은 해마다 가지 잘라내기의 많은 노동력을 낭비 하여야 한다. 일생을 잘리고 솎아지고 농약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강제로 자라나는 과일나무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인간에게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無慾(무욕)과 無對策(무대책)의 농법을 깨우치는것이 자연농법의 올바른 이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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